첫 만남은 정확히 5년 전이었다. 예전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춤 잘 추는 애, 끼 많은 애로 손꼽히긴 했지만 반 장난으로 나간 댄스 콘테스트에서 덜컥 상을 받게 될 줄은, 그리고 그걸 계기로 기획사에서 캐스팅을 당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 대회를 나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순영은 본래 꿈꿔왔던 대로 태권도 선수가 됐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처음엔 딱히 연예인이 되고 싶단 마음은 없었고 그보단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저, 지난번에 XX대회에서 명함 주셨었는데… 순영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데스크의 여직원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상냥하게 손짓을 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연예 기획사라길래 눈만 돌리면 티비 속에서나 보던 연예인들을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진짜 별거 없네. 순영은 생각했다. 괜히 왔나. 어쩐지 약간은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다.
-여기 들어가시면 돼요.
아무래도 연습생 전용 연습실인 듯, 불투명한 문 너머로 순영 또래의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러가며 춤을 추고 있었다. 여직원이 문을 엶과 동시에 춤을 추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순영에게로 향했다. 그 중 몇몇은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새로운 연습생의 등장으로 자신의 데뷔가 또 한 걸음 멀어질까봐 그게 두려운 거겠지. 순영은 꼭 타지에서 온 전학생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권순영, 이라고 합니다.
지독한 정적이었다. 아무 반응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순영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자신의 뒤통수를 헤집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심정이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어서, 순영은 약간쯤 씁쓸해졌다. 어쩌면 저들 중 일부는 순영이 얼마 있지 않아 나가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순영은 그런 생각이 들수록 이상하게도 괜한 오기가 일었다. 한평생 살면서 연예인, 아이돌 이런 게 되고 싶다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자신을 이토록 싫어하는 저들을 보고 있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연습생 생활을 제 발로 그만두는 순영을 보며 자기들끼리 거봐,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는 말을 할 거란 건 안 봐도 뻔한 시나리오였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순영은, 한 번 해봐야겠노라고 다짐했다. 자신이 과연 저들처럼 제 설 곳이 사라질까봐 하는 절박한 무서움 때문에 생판 처음 보는 이를 대놓고 싫어할 만큼, 그렇게 가수를 향한 열정이 생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안녕.
침묵만 감돌던 연습실을 깨트린 건 헐렁한 맨투맨을 입고서 저 구석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던 여자애였다. 짧은 머리가 언뜻 보면 남자애인가 싶기도 했지만, 새하얀 피부나 순하디 순한 눈동자가 영락없는 제 또래의 여자애였다. 여자애가 용기 있네. 의외였다. 다른 이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반응을 보이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저 작은 애가, 그것도 여자애가 자신의 소개말에 화답할 줄은 몰랐다.
-응 안녕.
순영이 올곧이 그 여자애만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리고 그 여자애를 선두로, 나머지 애들도 하나 둘 안녕, 반갑다, 잘 지내보자, 라며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 오기 시작했다. 여자애가 꽤 서열이 높나 보다. 순영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여자애 덕에 속 안으로 끓고 있던 답답함이 다소 해소됨을 느꼈다. 어쩌면 그건 고마움일지도 몰랐다.
순영이 이곳에 오게 된지도 어느덧 석 달 가량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순영은 난생처음으로 안무 선생님으로부터 전문적으로 춤을 배우게 되었고, ‘재능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으며, 친구들과 노래방에 놀러가서 고함을 지르다시피 빽빽 불렀던 걸 제외하곤 노래를 불러본 적도 없는 주제에 보컬실이라는, 이름부터 낯선 곳에서 온종일 발성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동안 그 여자애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같은 연습생이라고 함께 연습을 하는 건 아니었다. 순영처럼 갓 회사에 들어온 연습생은 B 연습실을 썼고, 그 여자애처럼 (아마도)오랫동안 회사에 적을 두고 있었던, 데뷔할 가능성이 더 높은 연습생들은 A 연습실을 썼다. 그래서 첫 만남 이후로 순영은 우연으로라도 여자애를 마주치지 못했다. 그 여자애를 짝사랑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건네준 애였으니 오다가다 눈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하는 마음에서 순영은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심지어는 이름도 몰랐으니, 더 그랬다.
-순영아, 잠깐 이리와 봐.
연습생을 총괄 담당하는 형의 부름이었다. 순영은 마이크를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형에게 답했다. 잠시만요. 그리고선 문가에 서 있는 형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일인데요? 순영의 물음에 형은,
-너, 연습실 옮기게 됐다.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건넸다. 그래서 순영은 어벙한 표정으로 네?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A 연습실 쓰라고. 그 말인 즉슨, 순영이 데뷔반으로 옮겨진다는 걸 의미했다. 전보다 커진 가능성에 좋아할 겨를도 없었다. 그야 말로, 당황스러웠다. 자신은 여기 온지 석 달밖에 안 됐고, 딱히 그런 언질이 오고간 것도 아니었다. 사실 저 멀리서 연습하는 척 하면서 자신에게로 신경을 곤두서고 있는 저들을 향한 죄책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엔 단지 기분 나쁜 시선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석 달 정도 함께 몸 부대껴가며 지내다보니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순영은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한평생 인생 중 처음 마주하는 간절함과 무언가를 향한 맹목적인 열정에 할 말을 잃곤 했었다. 어쩜 저렇게나, 그런 마음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건 존경심이나 경외감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그래선지 더 달갑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회사에 발을 들였는지 순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 평생을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이곳에 들어온 저들과 자신은 비교조차 불가했다. 반 장난. 호기심. 그저 흥미. 재미. 그제야 비로소 순영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더 열심히 할게요.
마음먹었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형에게 순영은 또 한 번 머리를 수그리며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A 연습실과 B 연습실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 다만 확실히 A 연습실이 더 체계적이긴 했다. A 연습실엔 아예 하루 일과표가 존재했다. B 연습실의 규칙적인 듯하면서도 유동적인 스케줄과는 달리, A 연습실의 스케줄은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이후로는 연습을 하거나 집을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루 세 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자유시간도 없이, 그렇게 하루 종일 연습만 했다. 빽빽한 스케줄에 땀이 폭우처럼 쏟아졌고, 티셔츠는 말라 있을 날이 없었다. 그러나 순영은 그 느낌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B 연습실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좋았다.
무엇보다도.
A 연습실엔 그 애가 있었다.
-안…녕.
대략 석 달만의 인사치고는 정말 멋대가리 없었다. 순영은, 저도 모르게 대뜸 인사를 하고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와, 입술을 떼었다 붙일 때 나는 그 특유의 긴장했을 때의 건조한 소리가 순영을 부끄럽게 했다. 어색하니 어깨 옆에 머물러 있는 손바닥도 한몫 했다. 아, 쪽팔려.
-응.
순영의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답인사는 간결했다. 그리고서 자신을 그대로 스쳐지나가선 다시 연습에 열중하는 그 애의 뒷모습에, 순영은 다시 한 번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때도 느꼈지만 쟤 정말 안 웃는구나. 근데 그게 또 냉정하게 보이는 건 아니라서 희한했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지 않는데 순영은 알 수 있었다. 마음은 따뜻한 애일 거라는 것을. 어쩌면 첫 만남 이후로 순영이 간직하고 있던 무조건적인 호의의 일부일지도 몰랐지만.
-형,
누구를 부르는 거지, 설마 날 부르는 건가. 근데 저 앤 어떻게 안다고 날 부르는 거지. 순영이 멍하니 서서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부름에 답을 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어 왜.
그 애였다. ‘형’이라는 말에 대답을 한 건.
-아 진짜 순영이 형!
-뭐 임마. 그러게 누가 형한테 깝치랬냐?
아무래도 데뷔반이라 그런지 A 연습실의 분위기는 B 연습실 보다 더 좋았다. 월말 평가 시즌을 제외하곤 그다지 긴장감이랄 것도 없었다. 다들 속앓이를 하는 건지 어쩌는 건진 몰라도, 어쨌든 순영은 그 분위기가 꼭 제 집으로 돌아온 것만 같아 편했다. B 연습실은 그야 말로 전쟁터였는데 이곳 A 연습실은 학교 교실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두루두루 친하게, 가끔은 장난도 치고, 때때론 싸우고 토라져 치고 박고 싸우기도 하고. 제 성격엔 영 맞지 않게 무뚝뚝한 사람으로 지내왔던 B 연습실에서완 달리 A 연습실에서의 순영은 딱, 친구들 사이에서의 권순영 그 자체였다. 유쾌하고, 재치 있고, 유들유들한 것 같으면서도 쉽진 않은. 그런 순영의 친근한 성격 덕인지 순영은 금방 A 연습실의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A 연습실에 오게 된지도 어느덧 한 달, 그 동안 순영은 거의 모든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 적응한 상태였다. 딱 한 명. 그 애는 빼고.
순영은 차마 그 애를 떳떳하게 볼 수 없었다. 멀쩡한 남자애를, 단지 순하고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애로 치부해버렸다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또 그렇게 제멋대로 착각해버린 자신이 쪽팔리기도 했다. 실은 그 마음이 더 컸다. 쪽팔려서. 진짜, 못 견딜 만큼 쪽팔려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그냥 웃으면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음 모르겠는데 그 애를 볼 때마다 자꾸만 그 애가 없던 A 연습실에서 그 애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던 저 스스로가 떠오르니까 그럴 수 없었다.
-뭐 할 말 있어?
순영이 A 연습실에 입성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새로운 신입생 맞이 겸 단합 겸 해서 식사를 하게 됐다. 사실 식사라기엔 그냥 다 같이 연습실 바닥에 둘러 앉아 치킨을 시켜 먹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연습실에서의 치킨은 또 그 나름대로 새로운 맛이 있어서, 다들 불평 하나 없이 화기애애하게 치킨을 먹고 있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오직 순영만이 좌불안석이었다. 하필이면. 진짜, 하필이면이었다. 제 바로 옆자리가 그 애일 건 또 뭔가. 한창 순영이 그 애를 어색하게 여기며 다른 애들은 몰라도 그 애랑은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는데. 안 그래도 작은 게 쪼그려 앉으니 더 아담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치킨 먹는 데 열중하고 있는 그 작은 뒤통수를 보며 순영은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뭔지 새삼 깨닫게 됐다.
그러다가. 그 애가 먼저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어? 아…
순영이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늘 이런 식이다. 그 애랑 있으면 순영은 어쩐지 좀 모자라졌다. 어차피 그 애는 순영이 자신을 여자애로 생각했단 걸 꿈에도 모를 터였는데, 순영 혼자 괜히 눈치를 보다보니 벌어진 일들이었다. 무튼 순영은 그 애가 무슨 할 말 있느냐고 묻기 전까지는 자신의 시선이 그 애에게도 느껴질 수 있단 걸 몰랐던 셈이다. 순영을 빤히, 정말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 애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순영을 이상하게 본다든가 힐난한다든가 하는 시선도 아니었건만, 순영 혼자 제 발에 지려 그랬단 게 맞았다. 순영은 어떻게든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너 이름이 뭐지?
정말 ‘아무 말’을 했다. 아니 이게, 실은 그렇게 이상한 질문은 아니긴 했다. 왜 학교에서도 학기 초에 막 새롭게 반 배정이 됐을 때 얘가 누구고 얘가 누구고 이름을 곧장 못 외우는 것처럼 갓 A 연습실에 들어온 순영 역시 딱 그 상태였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 대신 그냥 눈치껏 할 일이었다. 낯간지럽게 한 명씩 악수를 주고받으며 통성명을 하는 건 순영 쪽에서도 원치 않았고, 뭐 그런 이유로 순영은 아직은 모든 애들의 이름을 알진 못했다.
그치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뜸, 치킨 날개를 먹다 말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건 없었다. 순영은 저를 뚫어져라 보는 그 애의 눈동자에 또 후회를 했다. 이젠 몇 번째 후회인지 세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지훈
형식적인 인사를 제외하곤 사실상 첫 대화였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이뤄질 줄은 또 몰랐다. 그러면서도 순영은, 그 애의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됐구나 싶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언뜻 언뜻 연습실에서 지훈이 형! 혹은 지훈아! 하는 부름이 울려 퍼졌던 것 같기도 하고. 이지훈. 순영은 속으로만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순영이 여자애로 오인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어느 학교에나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정석적인 남자애 이름이었다.
-어, 그래. 난 권순영,
그냥 이름만 듣고 말자니 그게 더 웃길 것 같아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제 이름까지 내뱉고 만 순영이었다. 첫 만남에 저 혼자 연습생들 앞에서 멀뚱멀뚱 서서 자기소개까지 한 주제에. 또 쪽팔릴 짓을 하고 말았다.
-알아.
아 진짜. 그냥 죽을까.
지훈은 늘 그랬듯이 순영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순영의 알 수 없는 언행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그렇다고 호감을 드러내는 것도 뭣도 아니었다. 진짜 말 그대로 순영을 ‘봤다.’ 비록 순영이 지훈을 오랫동안 알아온 건 아니었지만 단편적인 면모들만 봐도 지훈이 무덤덤한 성격이란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
그리고 또 정적. 순영은 결국 그날 체하고 말았다.
도대체가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었다. 정말 사람과 사람 간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벽이 존재한다면 순영은 저와 지훈 사이엔 베를린 장벽과 견줄만한 벽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님 38선이라든가. 그렇다고 처음처럼 그게 못 견디겠고 그런 건 또 아니었고, 순영은 교실에서 자신과 별로 안 친한 애와 지내는 것처럼 딱 그 정도 선에서 지훈을 대했다. 지훈 역시 그런 저와 마찬가지인 듯 보였고.
-너 지훈이랑 어색하잖아.
그래선지 이런 얘기도 적잖이 들었다. 순영은 그때마다 그냥 웃어 넘겨 모면하긴 했는데 이게 너무 정곡이라 할 말이 없던 거였다. 어떻든 권순영과 이지훈이 어색한 사이란 건 A 연습실의 모든 연습생들이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게 뭐 큰 거라고 쉬쉬할 건 없었고 다들 최대한 순영과 지훈 단 둘이 있을 때를 기피하긴 했다. 거기에 끼는 것만큼 숨 막히는 일도 없을 테니까. 차라리 입 밖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싸웠더라면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이 툭 까놓고 풀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서로를 싫어하는 건 분명 아니었다. 적어도 순영으로서는 그랬다. 순영이 지훈에게 갖는 감정은 차라리 호감에 더 가까웠다. 단지 늘 어느 한 구석에서 쪽팔림이 졸졸 따라올 뿐이었다. 그러니까, 순영이 지훈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건 팔 할이 그 쪽팔림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또 운명이 장난을 칠 줄은 몰랐지.
매월 진행하는 월말 평가는 그때그때 한 이주 전 쯤 주제가 공개됐다. 이를 테면 R&B, 남자 아이돌 히트곡, 힙합 등 매번 달랐다. 그리고 이번엔 ‘듀엣’이었고.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연습생답게 자기들끼리 자율적으로 팀을 꾸릴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뭐, 하는 심정으로 순영은 자신의 파트너를 확인하기 위해 벽에 구름처럼 둘러싸인 이들 틈을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가는 참이었다.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아 이지훈만 아니면 좋겠네 하는 불안감이 스쳐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설마 그 많고 많은 애들 중에 이지훈이랑 되겠어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권순영 / 이지훈
벽에 나붙은 종이엔 저와 이지훈의 이름이 한 줄에 놓여 있었다. 순간 저가 잘못본 거겠지 싶어서 손가락까지 뻗어서 종이를 더듬어가며 확인해봤지만, 두 눈 씻고 봐도 권순영 옆엔 이지훈이, 이지훈 옆엔 권순영이 있었다. 꼭 누가 의도적으로 붙여놓은 것 마냥… 이라고 해봤자 이게 무작위로 정해진 거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야 권순영 너 이지훈이랑 한다.
확인사살, 순영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쪽에서 좋다고 얼싸안고 있는 무리를 보니 더 착잡해졌다. 아니 지금 당장만하더라도 저와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곳에서 저처럼 한참이나 종이를 쳐다보고 있는 지훈에게 다가가 같이 하게 됐다며 인사를 먼저 건넬 자신이 없었다. 양떼처럼 벽 앞에 다닥다닥 모여 있던 인파들이 어느새 자리를 떠나고, 오로지 순영과 지훈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권순영
누가 들어도, 의심의 여지없이, 지훈의 목소리였다. 순영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갤 돌렸고 지훈의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했다. 한때는 여자애로 착각하게까지 했던 지훈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지훈은 순영의 눈앞을 깜깜하게 만들 뿐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순영의 온 신경이 지훈에게로 곤두섰다.
-오늘 연습 끝나고 남아.
지훈이 말하는 연습이란 6시, 정규 연습 시간이 끝나는 시간일 터였다. 평상시에는 몇몇을 제외하곤 6시 넘어서까지 연습하는 애들은 거의 없었다. 월말 평가를 앞두고서가 아주 난리였다. 새벽까지 연습하는 경우도 허다했고, 연습실에서 쪽잠을 자며 아예 밤을 꼴딱 새는 경우도 드물진 않았다. 그리고 순영이 아는 바로는 자신과 지훈은 후자에 속해 있었다. 하도 연습실에 딱 두 개 있는 소파를 각자 하나씩 차지해 잠을 자다보니까 형들이 저건 권순영 전용 소파고, 저건 이지훈 전용 소파라며 농담 삼아 말하기도 했었다.
-나가서 뭐 좀 먹으면서 얘기하게.
당연히, 연습실에서 회의를 할 줄 알았다. 그럼 주위에 다른 애들도 있을 거니까(물론 저마다 제 할 일 하기 바쁘긴 하겠지만) 어색함이 좀 덜해질 거라 생각하고 그걸로 위안 삼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가자 할 줄은 몰랐다. 그럼 지훈과 자기가 마주보고 앉아 뭘 먹어야 한다는 건데, 지난 번 치킨 먹을 적에 옆에 앉은 것만으로도 체할 것 같았건만 오늘은 대체 얼마큼이나 불편할지 상상만 해도 죽을 만큼 싫었다.
-연습실은 시끄러우니깐.
그러고서 또 덧붙이는 말에, 순영은 ‘왜 그냥 연습실에서 하자’라고 하려던 말을 꾹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단 애한테 부득부득 억지를 부려 연습실에서 하자고 하기엔 순영이 너무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훈의 말이 맞기도 했고. 월말 평가를 할 때면 아무리 서로에게 피해 안 가게 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방해가 됐다. 아무래도 오디오가 섞이니까. 그렇다 보니 월말 평가를 일컬어 집중력 싸움이라 칭하는 이들도 있었다.
거의 일방적인 통보를 하다시피 말을 툭 내뱉곤 유유히 그 자리를 뜨는 지훈이었다. 순영은 혼자 남아 제발 월말 평가 전까지 아무 문제가 없기만을 바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조용히, 평화롭게 앞으로 남은 2주를 보내게 해달라고.
연습이 끝나기만을 바란 적은 있어도, 이토록 연습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란 적은 또 없었다. 순영은 기어코 오고 만 운명의 시간에 체념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지, 이김에 친해져보지 뭐, 라고 생각해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단 걸 순영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
-…….
지훈이나 저나 돈 없는 중학생이다 보니 결국 오게 된 곳은 연습실 근처 편의점이었다. 편의점 내부에 나 있는 일자형 테이블에 딱 붙어 앉아 컵라면이 익기만을 기다리며 창문 밖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순영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싶었다. 돌이켜보면 도망치는 건 늘 자신이었다. 지훈이 옆에 올라 치면 화들짝 놀라 자리를 비웠던 것도 저였고, 다른 애들이 장난치고 있음 꼭 사이에 껴서 한 마디씩 던지곤 하던 저였건만 지훈이 있을 때면 못 본 척 지나가곤 했었다. 순영은 어쩌면 자기 때문에 지훈과 자신이 이렇게 어색한 사이로 남아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됐다. 대체 그 쪽팔림이 뭐라고. 다른 건 다 대수롭잖게 넘기면서 그거에 혼자 민감해 하는 것도 저답지 않다고, 새삼 느꼈다.
-이지훈…아.
이 요상한 호칭은 또 뭐람. 이지훈, 이라고 하기엔 너무 딱딱해 보였고 지훈아, 라고 부르자니 또 낯부끄러워서 이지훈 이름 석 자 내뱉고 나서 다급하게 ‘아’자를 붙인 거였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그 부름에 순영은 들릴 듯 말 듯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저를 향해 고갤 돌린 지훈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입을 떼기 직전까지도 수 십 번은 고민했는데, 할까 말까, 아무래도 하는 게 더 낫다 싶어서, 근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까 좀 많이 오그라드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친구하자.
……아무래도 안 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불쾌한 건가? 어이없겠지. 이게 무슨 유치원생 화법이야. ‘친구하자’라니, 누가 요새 이런 말을 하고 친구를 한다고. 만약 지훈이 여자애였더라면 영락없는 작업 멘트였을 거였다. 그치만, 순영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지훈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더는 이 지긋지긋한 어색함도 못 참겠고, 저가 첫 만남부터 속으로 앓아왔던 그 쪽팔림을 입 밖으로 내어 그냥 한 바탕 웃어넘기며 훌훌 털어내려 했다. 근데 저를 쳐다보는 지훈의 얼굴은, 더 이상 후회할 여유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순영이 백번 천 번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 봤다.
-풉.
지훈이 웃는 걸. 저랑 비슷한 쌍꺼풀 없는 눈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순영은 처음 봤다.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모양새가 저러다 눈매랑 만나진 않을까 하는 괜한 생각을 들게 했다. 사실, 저를 볼 때만 무표정 했다 뿐이지 지훈이 아예 안 웃고 뭐 그런 냉혈한은 아니었다. 지훈이 유난히 친한 동생과 함께 투닥 대다 연습실이 크게 울려 퍼질 만큼 큰 소리로 웃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 미소의 방향이 저를 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순영은 지훈과 제대로 된 대화도 몇 번 나누지 않았으니까.
-너 진짜 웃긴다.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심지어는 저의 어깨를 툭 밀치며 더 크게 웃기까지 한다. 쬐끄만 주제에 주먹 힘은 또 어찌나 센 지 잠깐 스치고 지나갔을 뿐인데 팔뚝께가 얼얼했다. 뭐지 지금 이 상황. 순영은 상황 판단이 더뎠다.
-그래 하자, 친구.
지훈이 저를 향해 손을 내밀 때가 다 돼서야 제정신을 차린 순영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벙 쪄 있는 얼굴로 지훈의 손을 맞잡으며 순영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혹여나 저가 보고 있는 이 상황이 꿈은 아닐까 해서. 지난 몇 달 간 봐온 지훈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지훈은 하루아침에 아니 하루아침도 아니다 단 몇 분 안에 생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것부터가 적응이 안 됐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던가, 순영은 금세 지훈의 본래 성격(인지 새로운 성격인지)에 적응을 해서는 언제 지훈과 어색했냐는 듯 다른 제 친구들에게 하는 것처럼 욕도 섞어가고 가끔은 툭툭 치기도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껏 신이 나서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길 하고 있는 순영의 모습은, 마치 이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나 사실 너 첨 봤을 때 여자앤 줄 알았다.
-뭐?
-아니 워낙 하얗고 작고… 무튼 여자앤 줄 알았어.
지훈의 얼굴이 굳은 걸 보고 순영은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지훈과 자신은 어색한 사이였단 걸 상기해냈다. 미쳤어. 왜 그런 얘길 했지? 홀가분해지고 싶다는 욕심이 부른 참사였다. 사실, 그 누가 여자애로 알았단 말을 기분 좋게 듣겠는가. 게다가 순영이 봐온 지훈은 제법 아니 실은 매우 남자다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모든 연습생들이, 심지어는 형들마저 지훈의 말 한마디면 껌뻑 죽으니 그 성격이 얼마난지는 알만 했다.
-미쳤냐 진짜.
그러한 걱정이 기우였단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지훈의 눈꼬리가 휘어지며 순영이 보고 놀랐던 그 광경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졌다. 한껏 올라가는 입매와 그와 반대로 한껏 내려가는 입꼬리. 진짜 저러다가 딱 붙는 거 아냐.
-아 근데 좀 못생긴 여자애
한시름 놓은 순영의 장난기 서린 말에 지훈이 또 한 번 그 작지만 매운 주먹으로 순영의 팔뚝을 가격했다. 야 그래도 너 보단 내가 낫지. 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몇 달 간 순영을 삽질하게 만들었던 원인이 장난으로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다. 순영은 새삼 지난 일을 돌이켜보며 자신이 정말 바보 같았음을 인정했다. 말 한마디로 금방 풀릴 일을, 무슨 이유에선지 상황을 회피하며 도망 다니기 급급했던 저는 순영 자신이 봐도 참 한심했다.
-야 그리고 나 안 작거든?
지훈의 발끈하는 말을 뒤로하고 순영이 못 들은 척 삼각 김밥을 한 움큼 베어 먹었다. 아니거든 이 난쟁이 똥자루야. 기어코 지훈에게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순영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맞아.
-뭔가 이상해.
한참 지훈과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웬 시선이 느껴지길래 고갤 들어보니 어느 틈에 온 석민과 승관이 자신들을 수상쩍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왜 뭐가. 대꾸를 하는 순영의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지훈은 그마저도 없이 암말 않고 노래 감상에 열중이었다.
-형 원래 지훈이 형이랑 안 친했잖아요.
-맞아맞아.
-어색했으면서.
말문을 튼 건 승관이었고, 그 옆에서 촐랑대며 고갤 끄덕이는 건 석민이었다. 아닌데. 순영이 그런 승관의 이마를 검지로 툭툭 치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씨 이마 건들지 말라고오! 라고 외치는 승관의 목소리가 불만으로 그득하다. 싫은데에. 순영의 말에 잔뜩 약이 오른 승관이 아랫입술을 앙 깨문다.
-권순영이 먼저 친구하자고 했어.
그 소란 틈바구니 속으로 툭, 떨어지는 지훈의 말 한 마디. 내막을 모르는 석민과 승관은 엥? 하며 고갤 갸웃댈 뿐이었지만, 순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때 그 쪽팔림이 되살아나며 귓불을 붉혔다.
-야 근데 그거 아냐? 권순영이 나 첨 봤을 때……
순영의 손이 지훈의 입술을 다급하게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저를 우습게 보는 동생 둘인데 거기에다 그 일화까지 먹이로 던져줬다간 둘의 난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훈아 미쳤어? 순영이 나름 협박을 한답시고 지훈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 진짜 하지 마. 애원까지 해봤지만.
-뭔데 뭔데?
-……여자앤 줄 알았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석민과 승관에게, 제 품을 빠져나간 지훈이 기어코 말을 하고야 말았다. 아니, 편의점에서 진작 느꼈지만 쪼끄만 게 뭔 놈의 힘이 그렇게 센 지 얼얼한 팔을 주무르며 지훈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순영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뭐?
이어지는 웃음소리. 얼굴이 구겨지도록 웃으면서 저에게 삿대질을 하는 두 동생들을 보며 순영은 머리가 아찔해왔다. 그리고 아마도 그 다음 단계는.
-순영이 형이! 지훈이 형 처음 봤을 때 여자앤 줄 알았대!!!
짜증날 만큼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 시끄러웠던 연습실을 단번에 잠재울 정도로. 모든 애들의 시선이 순영에게로 쏠렸다. 뭐? 진짜? 와 대박이다 이어지는 감탄사(인지 아님 그냥 놀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에 순영은 딱,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저의 홧홧하니 불타올라 있는 얼굴을 쳐다보며 지훈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지훈 무서운 애네. 순영은 앞으론 절대 지훈에게 훗날 놀림감이 될지도 모를 말들을 절대, 절대 안 하기로 다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영은 지훈을 귀엽고 순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남 괴롭히는 데 취미 있는 애, 쬐끄마한 덩치랑은 안 어울리게 의외로 힘 겁나 센 애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해 그 여름까지만 해도 순영에게 지훈은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