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후편 




3년이 더 넘는 시간.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순영과 호형호제하던 연습생 중 몇몇이 결국 연습생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관두었고, A 연습실의 데뷔반을 더 추리고 추려 ‘세븐틴’(사실 처음엔 딱히 큰 의미는 없었고 그냥 17명이란 이유로 지어진 이름이었다.)이란 이름이 새롭게 붙여지기도 했으며, 또 지훈을 대하는 순영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순영은 언젠가부터 지훈을 대하는 게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근데 그게 초반에 둘이 어색했을 적 순영이 일부러 거리감을 두며 지훈을 피했던 식으로 조심스럽다가 아니라, 마치 애기들이 소중한 장난감을 다루듯이 하는 그런 의미의 조심스러움이었다. 처음엔 순영 저도 자신이 그렇단 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자각하게 된 것은 ‘세븐틴 티비’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생방송을 시작하고서부터였다. 사실 인터넷 생방송이라기엔 연습생들이 딱히 나서서 뭔가를 하는 건 없었고, 그냥 정해진 시간에 실시간으로 연습실의 모습을 공개하는 것뿐이었다. 소속사에서 ‘세븐틴’의 데뷔를 본격적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순영을 비롯한 연습생들로서는 딱히 반갑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또 팬들을 모으고 하는 건 두 팔 벌려 환영이었지만 그만큼 사생활을 침해당한다는 기분도 지울 순 없었다. 실수로라도 욕을 했다간 그날 바로 불려가선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치만 확실히 기분이 좋은 마음이 더 크긴 했다. 연습실에 왔더니 웬 배달음식이 한 가득이길래 뭐지 싶었다.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시청자 수가 뭐 몇 명을 돌파했단다. 그걸 자축하는 의미에서 피자를 시켰다는데 순영의 A 연습실 입성을 축하하며 먹은 치킨 이후로 정말 간만에 연습실에서 먹는 배달음식이었다. 연습실을 꽉 채우는 먹음직스런 냄새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어 들어가 둥그렇게 앉아선 허겁지겁 피자를 한 조각씩 꺼내 무는 연습생들이었다. 순영 역시 그 중 한 명이었고. 오랜만의 자유시간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진솔한 얘길 나누게 됐다. 우리 데뷔할 수 있을까.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넋두리는 곳곳으로 퍼져나가, 연습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어디선가 터져 나오는 한숨도 끊임없었다. 막 방금 전만 해도 신나서는 장난을 치던 아이들도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을 향해 고갤 처박고 있었다.

 

-야야 왜 또 우울해지고 그래.

 

승철이었다. 원랜 그냥 제일 맏형 그 정도의 위치였는데 세븐틴이란 팀 이름이 정해지고 ‘리더’라는 직책을 맡고 나니 그 뒤로 팀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갖게 됐다. 승철은 실없는 농담을 이어가며 다운된 분위기를 다시 띄우려 노력했다.

 

-우리 진실게임 하자

 

그런 승철의 노력에 부응이라도 하듯, 민규가 반 장난삼아 말을 던졌다. 그 말 한 마디에 남자들끼리 무슨 진실게임이냐, 오그라든다, 재밌을 것 같은데 하자, 여러 반응들이 오가며 분위기가 나름 회복된 듯했다. 그 수많은 의견들은 결국 하는 걸로 마무리 됐다. 여전히 싫다며 고갤 젓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소수의 의견은 가뿐히 무시됐다. (물론 이런 걸 유난히 질색하는 지훈은 그 쪽이었다.) 전부 미성년자니 술병이 있을 리는 없었고 다 먹고 비운 콜라병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돌리실 게요!

 

이런 걸 할 때마다 꼭 빠지지 않는 승관의 추임새였다. 꼭 어느 TV 프로그램의 진행자 같은 승관의 능청스런 말투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순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제 옆에 앉아 계속 이런 걸 왜 하냐는 둥, 우리가 애냐는 둥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지훈의 툴툴거리는 입술 끝이 철딱서니 없는 애 같아 웃길 뿐이었다. 가만 보면 지훈은 어른스러운 것 같다가도 이렇게 애 같은 면이 있었다. 맨날 지 혼자 철든 척은 다 하더니. 순영이 속으로 웃었다.

 

-어 순영이 형!

 

순영은 그제야 지훈에게 고정되어 있던 자신의 시선을 거두었다. 대체 얼마 동안이나 지훈을 보고 있었는지는 가늠할 틈도 없었다. 저에게로 향하는 16개의 시선을 홀로 받아내며, 순영은 자신에게로 쏟아질 질문을 겸허히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뭘 물어볼 건지 상상도 안 됐다. 여자라도 섞여있었음 좋아하는 사람 있냐, 첫사랑이 언제였냐, 이런 간지러운 물음을 던질 테지만 남자애들만 바글바글한 이곳에서 대체 나올만한 질문이 뭐 있나 하는 거였다.

 

-나나나나, 나 물어볼 거 있어.

 

석민은 양팔을 공중에 뻗기까지 하며 큰 리액션을 보였다. 쟨 또 왜 저래. 순영이 킥킥 댔다.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순영은 여유롭게 쭉 편 다리로 발장난을 치며 석민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뻔하지 뭐, 어이없는 질문일 거였다. 그럼 자신은 그 말을 되받아치면 될 것이고.

 

-형, 형은 왜 지훈이 형한테만 약해?

-어 맞아. 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니까, 넌 꼭 지훈이 말엔 껌뻑 죽더라.

 

석민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여러 애들의 말이 들러붙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말들의 향연에 순영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했다. 내가 지훈이한테 약하다고? 약하다는 게, 힘으로 약하다는 거면 모르겠는데(지훈은 말 그대로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걸 몸소 보여주곤 했다.) 그게 아니라 ‘껌뻑 죽는다’의 의미라면 정말 단연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거였다. 지훈은, 기상천외했던 첫 만남을 제외하곤 저한테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제 수많은 친구 중 한 명일뿐이었다. 물론 형 동생과는 나눌 수 없는 동갑내기 특유의 유대감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른 애들, 이를 테면 원우와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가지고 껌뻑 죽는다고 하는 건 아닐 거고 무슨 이유가 있긴 할 텐데 순영으로서는 도대체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뭔 소리야

 

언뜻 순영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운 듯했지만 실상 순영은 무지막지하게 당황한 상태였다. 석민의 질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석민의 말에 공감을 하며 말들을 덧붙이는 게, 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치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다른 애들이 그렇게 느낄 만큼 제가 지훈을 유별나게 대하고 하는 건 전혀 없었다.

 

-도대체 왜?

 

순영이 재차 물었다. 근데 그런 저를 쳐다보는 애들의 시선이 정말 그걸 모르냐는 듯한 시선이라, 순영은 다시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힐끔 지훈을 쳐다보니 지훈은 늘 그랬듯 무색무취의 표정이었다. 가만있어도 눈이 째진 게, 무표정하면 자기가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모르나. 순영은 괜스레 지훈의 눈치를 보게 됐다. 혹시나 화난 건 아닐까 하고. 정작 질문에 당황한 건 자기 자신이면서.

 

-솔직히 둘이 이렇게 친해질 줄은 진짜 몰랐다

-난 첨에 둘이 서로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분명 처음엔 진실게임으로 시작했는데 갑자기 주제가 저와 지훈의 관계로 넘어간 모양이다. 언제적 얘기를 하는지, 물론 남 일만큼 재밌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영으로선 또? 라고 묻고 싶었다. 이젠 지겨울 만도 한데 뭐 맨날 같은 얘기다. 순영은 손을 내젓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 옆에 앉은 지훈은 역시나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콜라나 홀짝이고 있었고. 다른 애들에겐 간만에 피자를 먹었단 거 빼곤 그저 그런 하루였을지 몰라도, 순영은 그날부로.

 

다시 지훈을 의식하게 됐다. 대체 자신의 어떤 면이, 애들을 그렇게 착각하게 하나 싶어서.

 

 

 

-김민규 너 진짜 맞고 싶어?

 

지훈이 자신보다 한참 큰 민규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민규의 명치를 치는 시늉을 했다. 아프겠네. 지훈의 주먹 힘을 뻔히 알고 있는 순영은 제가 다 민규가 된 양 미간까지 찌푸리며 고통을 공감했다. 전혀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었다. 지훈과 민규는 툭하면 저렇게 장난을 치고 했었으니까. 웬만하면 몸을 잘 쓰지 않는 지훈도 민규에게만큼은 먼저 짓궂게 장난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 근데 지훈이는 왜 김민규한테만 저럴까. 어.

 

그리고 순영은, 자신이 한참 동안이나 지훈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이런 걸 자각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시선이 어딜 향해 있는지 인식하면서 무언가를 보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물을 관망하듯 시선의 흐름을 놔뒀던 순영이었다. 문득문득 그걸 알아채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만큼 당혹스러워 할 건 없었다. 근데 순영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시선을 거두기까지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왜 놀랐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이었다. 충동적으로 고갤 돌리고서도, 저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훈과 민규가 장난을 치고 있었고 자신은 그런 지훈을 보며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그뿐인데,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꼭 비밀을 들킨 사춘기 소년 마냥 당황감을 감추지 못하냔 말이다. 그렇게 의식을 하고 나니, 여태의 일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가만 생각해보면 자신의 시선은 늘 지훈이 목적지였다. 무언가를 의도하고 보는 건 아니었고, 그냥, 그랬다. 별 생각 없이, 딱 그거였다. 이게 어떻게 보면 정말 별거 아닌, 대수롭잖은 거일 수도 있는데 며칠 전의 진실게임 때문인지 자꾸만 그날의 대화를 곱씹게 됐다. 애들이 저가 지훈에게만은 약하다 했다. 도대체 뭘 보고 약하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 말은 곧 자신이 다른 애들을 대하는 태도와 지훈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치만 순영 자신이 생각하기에 저는 정말이지 지훈을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동갑내기 친구. 희한할 만큼 작은(그렇게 쬐끄만 애는 처음 봤다). 무뚝뚝한데 의외로 웃음도 많고 장난치면 되받아칠 줄도 아는. 머릿속에 ‘이지훈’을 떠올려 봐도 그 단어에서 가지를 뻗어나가는 문장이라곤 죄다 이 정도였다.

 

그러다 내내 숨어 있던 단어 하나가 꺼져 있던 전등불이 켜지듯 반짝, 하고 순영의 머릿속을 밝혔다. 예쁘다. 생각해보니 가끔 지훈을 보면서 무의식중에 그 말을 몇 번 쯤 떠올렸던 것 같다. 실제로 순영은 세븐틴 티비를 찍다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기도 했다. 내내 흑발이던 지훈이 금발로 물들이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제 옆에 서서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지훈이, 그날따라 유난히 ‘예뻐’ 보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지훈씨, 하고 지훈을 불러놓고는,

 

-오늘 예쁘네요

 

충동이 절반 이상이었다. 지훈이 별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여 다행이었지, 만약 지훈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거나 했다면 순영은 한창 초반에 지훈을 볼 때마다 쪽팔림을 느꼈던 그때처럼 죽고 싶단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대신에 그 순간 순영은 자신이 이전에도 이 말을 한 적이 있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만큼이나 지훈이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제 말에 반응한 탓이었다.

 

-감사합니다

 

이게, 실은 지훈이 대놓고 불쾌해해도 순영은 아무 말 못할 거였다. 꼭 성별을 나누려는 건 아니지만 대개 남자한테는 예쁘단 말을 잘 안 쓰니까. 더구나 이 나이 때 아이들은 특히나 자신이 남자라는 과잉의식에 사로잡혀 매사를 남자다운 것과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었다. 흔히 ‘마초’라 일컫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지만, 순영 역시 예외일 순 없었다. 확실히 귀엽다는 말보단 멋있단 말이 더 듣기 좋았다. 그리고 그런 순영이 보기에 지훈도 저와 마찬가지였다. 남자다움에 집착하진 않아도, 장난으로라도 저를 여자로 대하거나 하는 꼴은 못 봤다. 첫 만남 일화야 그 당시엔 한창 친하지 않았을 때니 웃어 넘겨준 거지, 지금 그랬더라면 적어도 명치 한 대는 맞았을 거라고 확신하는 순영이었다. 그래선지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되레 순영이 당황했다.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하면서. 그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고, 그 다음은 ‘지훈이가 예쁜가?’였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딱 봤을 때 예쁘다고 할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굳이 주변에서 예쁜 얼굴을 찾자면, 정한이 형이나 지수 형이 오밀조밀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지 지훈이는 귀여운 얼굴이라고 하면 모를까 예쁘다고 할 순 없었다. 근데, 평상시엔 별 생각이 없다가도 지훈이 웃는 얼굴을 보면 문득문득 예쁘다는 말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곤 했다. 눈꼬리가 쳐졌다던가 해서 눈웃음을 특징으로 하는 얼굴도 아닌데, 희한했다. 이게 자기만 예쁘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님 사실 지훈이 예쁜 얼굴이었던 건지, 순영은 궁금해졌다.

 

-야 너도 예쁘냐?

 

너도 예쁘냐라는 말에는 사실 너도 지훈이를 예쁘다고 생각 하냐는 말이 생략되어 있던 건데, 영문을 모르는 한솔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이 형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으로 에? 되묻는 한솔에게 순영은 그냥 고갤 저었다. 원래 물어보려 했던 걸 그대로 물어봤다간 한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그것도 그거대로 기분이 안 좋을 것 같고, 한솔이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그것도 딱히 유쾌한 기분이 들 것 같진 않았다.

 

진짜, 내가 왜 이러지. 순영이 자신의 머리를 흩트리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민이 다 그렇듯 전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도 고민하기 시작하니 이젠 자꾸 신경이 쓰였다. 습관처럼 지훈에게 향하는 시선도 일부러 다른 데로 돌리느라 애썼고, 지훈과 대화를 할 때면 한 번 더 생각을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순영은 깨닫게 됐다. 대체 왜들 그렇게 자신을 보고 지훈에게 약하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지훈은 뭔가 달랐다. 지훈과는 자기가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게 됐으니 햇수로 3년이나 친구였던 셈인데, 이상하게도 지훈한테는 다른 형이나 동생, 혹은 친구들한테 그러는 것처럼 막 대하질 못했다. 지훈이 유난히 자신한테 특별한 존재다?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하루 24시간을 놓고 따지자면 순영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쪽은 지훈보단 오히려 석민이나 찬, 이쪽이 더 많았다. 지훈 역시 자기보단 민규나 승철과 더 가깝게 지냈고. 그렇다고 또 지훈과 안 친한 건 아니고, 사실 다 같이 형제처럼 지내는 판에 친밀도의 차이를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친하긴 친한데, 일반적으로 남자애들끼리 하는 스스럼없는 비속어를 순영은 차마 지훈에게만은 못 했다. 이를 테면 새끼야, 병신아, 같은 말들을 지훈에겐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훈이 욕을 전혀 않는 그런 애도 아닌데.

 

요약하면 순영 저는 확실히 지훈에게만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아마도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애들이 자신이 지훈에게 약하다고 하는 건가보다고, 순영은 생각했다. 그치만 자신이 왜 지훈에게만 조심스러운가에 대해서는 아직은 가닥조차 잡히질 않았다. 숱한 애들과 친구가 되어봤지만 이런 식의 친구 관계는 처음이었다. 자존감이 높은 순영 성격에 먼저 굽힌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근데 지훈만은 달랐다. 누군가 지훈과 저의 관계에 굳이 갑을을 따져 자신을 보고 을이라 해도 순영은 부인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든 관계의 을이 되고 싶지 않을 테지만 순영은, 그 상대가 지훈이라면 기꺼이 을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순영은 도통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훈이혀어어엉

 

막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가 연습실을 크게 울렸다. 아 김민규 시끄러워! 승철의 타박하는 말이 이어지고, 당연하게도 그 다음은,

 

-무거워 미친놈아!

 

지훈이었다. 지훈은 자신의 어깨 위를 무겁게 짓누르는 민규의 팔을 피하려 애쓰며 신경질을 냈고, 민규는 지훈을 뒤에서 안다시피 하는 자세로 오히려 더 치댔다. 아 진짜 무겁거든? 안 비켜? 싫은데에에. 둘의 투닥거림이 핑퐁처럼 계속됐다. 둘이 저렇게 붙어 있는 건 흔한 풍경이었다. 민규가 일방적으로 귀찮게 굴면 지훈은 짜증을 내는 식으로. 물론 그게 정말로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서 그런 건 아니었고, 지훈 성격 자체가 원래 그랬다. 그런 성격이 더 장난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는 건지.

 

-…….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순영은 자신의 얼굴이 빳빳이 굳어져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너무 화가 나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직접 느껴지듯 순영이 딱 그 상태였다. 표정관리가 안 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는 저 스스로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순영은 머리가 복잡했다. 요사이 이런 일련의 일들이 계속 됐다. 감정 제어를 못하는 어린아이 마냥 불쑥 지훈을 향한 알 수 없는 마음이 쏟아지다가도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다보니 지훈과의 거리가 당연하게도 멀어지고 말았다. 싸우고 난 후처럼 서먹하고 어색하고 그런 사이라기보다는 그냥 순영이 일방적으로 지훈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훈과 말을 아예 않는다던가, 지훈의 시선을 피한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되도록 지훈과 단둘이 있는 시간만은 피하고 싶었다. 지훈이 가까이 있을수록 자꾸만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들곤 했으니까. 그니까 지훈이 싫고 불편한 게 아니라, 지훈과 같이 있을 때의 저 스스로의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불편했다.

 

그랬는데,

 

-가위바위보!

 

한여름 날의 연습에 지쳐 가위바위보 내기를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기로 했다. 혼자 가기엔 너무 버거우니까, 두 명을 뽑기로 했는데 저와 지훈이 같이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스크림을 사러가는 번거로움은 그다지 별 상관없는데 지훈과 함께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지금 당장 둘이 나란히 연습실을 나가는 것부터가 걱정스러웠다. 뭐 할 말도 없는데,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걸어가기엔 그게 더 불편할 것 같고, 이런 순영의 속을 모르는 지훈은 멀뚱멀뚱 문가에 서서 순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어, 어,

 

말이 저절로 더듬어졌다. 상호 간에 어색함을 느끼던 초반이라면 그냥 불편함만 느꼈을 텐데, 이번엔 저 혼자만 일방적으로 어색함을 느끼는 거니까 미안함도 더해졌다. 지훈은 전처럼 저를 편안히 느낄 거란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심정은 배가 됐다. 그럼 더, 이래선 안 된단 걸 알았지만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순영 쪽에서도 마냥 답답할 뿐이었다.

 

-…….

-…….

 

확실히 여름이 오긴 했나, 장마가 일주일은 내리 이어지고 있었다. 연습실에 나뒹굴던 누구 것인지 모를 장우산을 들고 나온 순영과 지훈은 오고가는 대화 한 마디 없이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만 있었다. 연습실 바로 앞은 편의점뿐이라서, 좀 멀긴 멀더라도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엘 가야했다. 최대한 널찍이 거리를 두고 걸어가려 했지만, 같은 우산 아래서 언뜻언뜻 닿는 어깨는 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 적마다 순영은,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처음엔 그냥 어색해서, 불편해서, 또 미안해서 그런가보다 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다잡으려 괜히 실없는 농담도 던져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편해지질 않았다. 도리어 더 심장이 쿵쾅대며 뛰었다. 가뜩이나 건조한 입술이 연신 메말랐고, 꼭 갈증이 난 양 목이 탔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괜히 엄한 데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그니까 이건 마치.

 

사랑에 빠진 느낌이었다.

 

익숙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낯선 것만도 아니었다.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여자애를 볼 때마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닿지 못한 손끝이 안달이 났다. 손잡고 싶다. 이 낯간지러움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순영은 처음으로, 지훈의 손을 쥐어보았다. 보드라운 손바닥이 순영의 혓바닥을 간지럽혔다. 제 손 마디마디로 꽉 들어차는 말랑한 손가락에, 순영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

 

지훈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순영은,

 

-좋아해

 

첫 번째 고백을 건넸다.

 

 

 

애초에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떠오르는 바는 곧이곧대로 말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하지 않음으로 인한 답답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말을 툭 내뱉어놓고 후회를 하면 했지, 무튼 그런 성격 탓에 순영은 의도치 않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마찬가진가 보다고, 순영은 생각했다. 1년 쯤 전 우산을 나눠 쓰고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던 날, 지훈의 자그마한 손이 자꾸만 순영을 재촉했다. 저가 지훈을 좋아한단 걸 깨닫게 된 그 순간 순영은 당장 제 마음을 끄집어내 지훈의 앞에 내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좋아해, 라며 무턱대고 고백을 한 거였다. 그리고 지훈은 어, 나도, 이 한 마디가 다였다. 아무래도 대수롭잖게 여긴 것이 분명했다. 그야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으니까. 그냥 지훈은 뜬금없다, 이 문장 하나로 순영의 고백을 가뿐히 넘겼을 거다.

 

그치만 순영은 그런 지훈 때문에 가슴을 아파할 만큼 여린 성격이 되지 못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지훈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공적인 일엔 예민하지만 사석에서의 지훈은 차라리 둔한 편이었다. 애가 워낙 진중해서 그랬다. 확실히 지훈은 또래 애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 작은 머리로 묵직한 생각들을 담아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 책임감이랄지 그런 특성이 유달리 발달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지훈을 5년이 다 되어가도록 곁에서 지켜봐온 순영은 지훈을 좋아하게 되면서 더, 지훈의 성격을 이해하게 됐다. 지훈에게만은 달랐던 순영의 태도에 관대함이 추가된 셈이다. 한때는 애들이 저더러 지훈을 끔찍이 여긴단 말을 납득 못했던 적도 있었다. 멍청한 얼굴로 왜? 하고 되묻기만 했었다. 그러나 요즘의 순영은 저가 지훈을 좋아한단 걸 받아들였던 그날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훈을 다른 애들과는 달리 여긴다는 말을 가볍게 인정했다. 워낙 공공연한 사실이라 이젠 그걸 걸고 넘어 지는 애들도 없었다.

 

-지훈아 오늘 예쁘다 너

 

그만큼 순영은 더 노골적으로 제 마음을 드러냈다. 툭하면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이런 오그라드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처음에 그 말을 저도 모르게 던지고서는 당황했던 게 무색하도록 이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지훈은 그때마다 응. 혹은 고마워. 라며 일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도 그러니까 순영이 그럴 때마다 다들 그냥 그러려니 했다.

 

-피곤해?

 

순영의 다정스러운 손길이 지훈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팀이 결성되고서 매년 데뷔가 코앞이란 말을 들어오긴 했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정말 데뷔가 임박해 있단 게 느껴질 정도로 회사는 분주했고 ‘세븐틴’이란 이름뿐이었던 팀은 힙합팀, 보컬팀, 퍼포먼스팀으로 보다 더 체계적으로 나뉘어졌고, 팀의 이름을 내건 인터넷 개인 방송이 시작됐으며, 몇 달 후에 한 케이블 방송에서 리얼리티를 찍을 거란 소문이 애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어 돌았다. 그리고 거기에 비례해 지훈의 몸은 죽어났다. 언젠가부터 지훈은 작곡에 두각을 드러냈다. 어릴 적 전공한 클래식 덕인지, 지훈은 그야 말로 천재적이었다. 회사 내 프로듀서들은 다들 입을 모아 지훈의 재능을 높이 샀다. 그 후로 지훈은 다른 애들이 춤과 노래, 랩에 전념하는 동안 작곡까지 챙겨야만 했다. 회사의 권유도 있었지만 지훈 스스로 택한 것이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더하니, 지훈의 작곡 실력은 하루가 무섭게 성장했고 어느새 지훈의 작곡용 노트북엔 수도 없이 많은 자작곡 파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과정을 보며 굳이 외부 작곡가에게 곡을 의뢰할 필요가 없다 판단한 회사는 지훈에게 데뷔 앨범 전곡 작곡 및 프로듀싱을 맡겼다. 지훈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고, 꼭 저뿐만이 아니더라도 ‘자체 제작 아이돌’이란 타이틀을 내건다면 사람들에게 더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 멤버들은 그런 지훈이 고마우면서도 안타까웠다. 특히 지훈과 비슷한 입장으로, 팀의 안무를 담당하게 된 순영은 그 마음이 더 했다. 안무를 창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퍼포먼스 팀 소속 멤버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디어를 착안해낼 수 있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작곡은 어떻게 누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홀로 작곡실에 갇혀 밤늦도록 곡 작업을 이어가는 날들이 계속되자, 지훈의 기분이 눈에 띄게 다운되어 보였다. 말수는 극도로 적어졌고, 예민함은 극도로 커졌다. 다들 먼저 나서서 몸을 사리며 지훈의 눈치를 보는 사이, 순영은 어떻게 하면 지훈의 부담감이 덜해질까 그 생각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뭘 한다 해도 지훈의 어깨 위를 차지한 부담감을 덜어줄 순 없을 거란 걸, 순영은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힘들어 하는 걸 마냥 지켜봐야만 하는 것만큼 힘겨운 일도 없었다. 순영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토닥임 밖에 없었다.

 

요사이의 지훈은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야 숙소에 오곤 했다. 순영은 밤잠을 설친다는 핑계로 그때까지 컴퓨터나 휴대폰을 하며 지훈을 기다렸다. 굳이 현관문까지 나서서 왔느냐며 마중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제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지훈이 들어오는 소리,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잠에 드는 순영이었다. 그래선지 아마도 지훈이 정해놓은 마지노선인 듯한, 새벽 두 시가 넘어서도 지훈이 오는 소리가 들리질 않으면 괜히 걱정이 됐다. 평소라면 적어도 10분 내엔 왔었는데, 20분이 넘도록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영이 제 휴대폰을 몇 번이나 껐다 키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쩐지 불안한 듯한 손가락이 의미 없는 움직임을 계속했다. 순영은 괜히 인터넷에 들어가 포털 기사들을 뒤적거리다, 이젠 저와 지훈이 나눈 메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울, 오늘 비]

 

메인 화면에 있는 날씨 위젯을 확인하게 됐다. 그 위에선 빗방울이 이따금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서 조심스레 창문가에 가 확인해보니 정말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뜻 며칠 전 뉴스 기상예보에서 장마가 시작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어둑어둑한 새벽하늘을 배경 삼아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며, 순영은 잠시간 고민했다. 지훈이가 우산을 가져갔던가. 보통 때라면 연습실에 주인 없는 우산이 한 가득이었을 텐데, 요즘은 하도 비가 많이 내려서 남는 우산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문자를 보내볼까.

 

무턱대고 전화번호부에서 ‘지훈이’를 찾아 문자메시지를 보내려했지만 머뭇거리는 손끝이 차마 키패드를 누르지 못했다. 도대체 뭐라고 보내야할지 모르겠어서. 지훈의 번호 주위를 배회하는 손가락을 보던 순영의 머릿속으로 번뜩, 가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 순영이 침대에서 제 몸을 일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대충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고서 혹여나 멤버들이 깰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섰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숙소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우산을 쓴 순영의 얼굴이 어쩐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꼭,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숙소에서 봤을 땐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덧 정말 비가 되어서는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접은 우산을 탈탈 털며 연습실에 들어선 순영은 거의 지훈의 독방과 다름없는, 작곡실을 향해 갔다. 역시나 불투명하게 코팅된 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괜히 손바닥을 바지춤에 한 번 슥 닦아내고선 문손잡이를 쥐어 돌리는 순영이었다. 이 문이 열리면, 지훈이 있을 터였다.

 

-…권순영?

 

인기척을 느끼고서 뒤를 돈 지훈이 의외라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영은 어색한 미소를 내보이며, 지훈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입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말들은 많은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 모든 말을 앞지르고 나선 건,

 

-그냥 잠이 안 와서.

 

뻔한 거짓말이었다. 지훈은 별 반응 없이 고갤 끄덕거리고는 다시 작업을 이어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제 얼굴만 한 헤드셋을 끼고서 신디사이저로 무언가를 하는 지훈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던 순영이 더는 못 참겠다고, 생각했다.

 

1년도 더 전에 첫 번째 고백을 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했다. 저가 지훈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챔과 동시에 거의 충동적으로 내뱉은 고백이었다. 지훈을 향해 발딱대는 심장이 자꾸만 순영의 입술을 자극해왔고, 순영은 그 간지러움을 못 참고 제 마음을 토해낸 거였다. 그러나 제 고백은 지훈에 의해 무참히 씹혔다. 지훈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사실 그 타이밍에 제 고백을 진지하게 듣는단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그때 저와 지훈은 가위바위보 내기에서 져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중이었으니까. 어쨌든 제 고백은 무시된 거나 다름없었다.

 

-지훈아

 

고요를 깬 건, 순영의 목소리였다.

 

-지훈아

 

한 차례 더 이름을 호명하니 그제야 헤드셋을 빼고 저를 쳐다보는 지훈이었다.

 

-좋아해

 

순영의 말끝에 약간의 떨림이 묻어났다. 이번은 그때처럼 무시되고 싶지 않아서 순영은,

 

-정말로… 좋아해

 

재차 제 마음을 드러냈다.

 

사랑이란 건 얼마나 무서운가. 순영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제 목소리가 참 낯설다고, 어색해 했다. 오래도록 쌓아온 저의 진심을 뭉치고 뭉쳐 지훈에게로 내던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몸서리칠 만큼 고요한 적막이 이어졌다. 순영은,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제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지훈이 제 진심을 알아주는 것. 그때처럼 흘러가는 말이 아니라, 그저 그런 장난이 아니라, 순영이 자신을 이렇게나 ‘사랑’한다는 걸 알아주는 것, 그뿐이었다. 어쩌면 차일지도 몰랐다. 지훈이 욕이나 심한 말로 저를 상처 줄 수도 있었다. 그치만, 그 모든 건 순영의 깊고 깊은 진심 아래 일순간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순영은 제가 지훈을 품은 마음이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건, 사랑이었으니까.

 

-난 너 안 좋아해

-…….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아아, 첫 번째 실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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